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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옷마저 벗어버린 가난의 삶
최초의 탁발수도회 설립
평화의 사도로 사명 다해


"저는 저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1206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는 청년은 부모로부터 제공되는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입고 있던 옷마저 돌려주면서 이같이 가족들과의 이별을 고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가난과 복음 전파의 삶"은 지금껏 너그러움, 단순하고 천진한 신앙심, 신과 인간을 항한 헌신, 자연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겸손의 모습으로 사람들안에 전해져오고 있으며 "중세기에 나타난 가장 사랑받는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평화의 기도", "태양의 노래" 등 주옥같은 기도문으로도 친숙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 1226)는 교황 1ㅣ오12세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로 불릴만큼 복음 정신을 따르는 청빈과 무욕 무소유의 모습을 보인 성인이다.
또한 그러한 가치는 최초의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 설립과 함께 800여년의 역사가 되어 세상 안에 함께 하고 있다.

1181년 혹은 1182년 이탈리아 옴브리아 지방의 소도시 아시시 태생인 프란치스코는 포목상을 하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시시라는 도시 출신의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이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한 부모의 영향아래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들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는 부유한 부모가 제공하는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면서 자랐고 그 역시 부모보다 오히려 더 그러한 세계를 추구했었다."(Thomas von Celano, Erste Lebensbeschreibung des hl?Franziskus, Nr.1). 생애 전반부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이 문장에서 엿보듯 프란치스코는 젋은 시절 유복한 생활을 했고 화려한 옷에 향략적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뻬루지아와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던 프란치스코는 1202년부터 1203년까지 포로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됐고 1205년 다시한번 전투에 참여했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일련의 계시를 듣게 된다.
무기와 전쟁도구들로 가득 찬 궁전과 성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이 모든 것이 너와 너를 따르는 사람들의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종과 주인 중에서 누가 너에게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당연히 주인입니다."고 답한 프란치스코에게 "그럼 너는 왜 종을 따르느냐. 아시시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그곳에서 너에게 나의 뜻을 알려주마."라는 내용이었다.
꿈속에서의 체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상당한 전환점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주었다.
아시시로 돌아온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에 몰두하였고 어느날 아시시 산 근처 성 다미아노(San Damiano)성당에 있는 십자가상으로부터 "가서 무너지려고 하는 나의 집을 돌봐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글자 그대로 허물어져 가는 성당을 고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포르티운쿨라, 성 베드로 성당들을 차례대로 고쳐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과제가 "교회의 내적인 삶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소명을 깨닫게 된다.
가진 옷마저 벗어버리고 하느님으로부터의 불림을 천명한 그는 1208년 성 마티아 축일에 사도돌의 파견에 관한 복음 말씀, 즉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는 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길을 걷기 원하시는지 깨닫게 됐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청빈한 삶이었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또한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 무렵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이 생겨나게 되면서 함께 움막 생활을 하던 프란치스코는 다시한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성서를 세번 펼쳤는데 이때 발견한 구절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이 때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해야 될 일과 미래의 우리 형제들이 해야 될 일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여!" 라고 외쳤고 한편 함께 했던 동료들은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를 복음 안에서 생생히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곳곳에 '회개와 평화' 선포
작음의 영성 . 형제애 추구
자연과 우주로 사항 확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겨준 영성은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사도적 선교적 영성" 그리고 "작음과 형제애의 추구"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특히 "그의 영성이 무엇보다 복음적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인이 살았던 당시의 13세기 교회는 교황권이 절정에 올라 황금기를 맞고 있었고 지상권 역시 교황권에 예속되 있었던 만큼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세상을 통치하고 세속의 권세는 영적인 권세인 교황권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관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또 교회 모습은 거대한 국가조직처럼 갖춰져있었고 신자들 역시 믿음과 삶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봉건적 예법과 권위체를 받아들이던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 교회를 다시 세우고 복음이 지닌 진리를 증언하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삶을 보였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서를 통해 그 시대 교회에 풍미했던 그리스도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가난하게 사셨고 겸손하게 사셨으며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프란치스코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따라야할 그리스도였다.

프란치스코는 또 자신과 초기 동료들을 "아시시의 회개자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것이었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며 선포하신 첫 말씀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따르는 것이었다. 실제 프란치스칸들이 교황으로부터 회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후 받았던 첫 공식 소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회개와 평화"를 설교하라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칸 관계자들은 성인의 "시에나 유언(Siena Testament)"을 정신적 유산으 핵심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1226년경 성인이 중병에 걸려 시에나에서 아시시로 오는 도중 레 첼레(Le Celle)에서 구술한 것, 즉 "형제들 서로간에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청빈을 언제나 사랑하고 지켜가야 한다. 거룩하신 어머니이신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언제나 충실하고 순명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가난 겸손의 삶"과 함께 성인이 지닌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 작음과 형제애의 영성이 잘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없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이단에 빠지는 오류들이 범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근본 이유가 교회안에서의 삶을 택하지 않은데 있다고 보았다.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도들을 주축삼아 세운것이고 그런만큼 교회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삶은 그리스도로부터도 확인되지 않은 삶이라는 관점에서다.
선교적인 면 역시 13세기 교회상황과 맞물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때 유럽내 모든 나라들이 그리스도 교회화 되었으나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사명은 숨죽어 있던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이에 맞서 본질적 사명인 선교에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제자들을 보내 새로운 수도회를 곳곳에 세웠고 그들은 유럽을 신앙심으로 일깨우고 이슬람과 극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작음"의 모습은 일반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성인을 가장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 성인에 있어 "작음"은 권력이나 특권 지위를 얻으려는 인간적 욕망을 끊는다는 뜻이고 가난과 겸손이라는 덕목을 포함하고 있다. 또 그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의 가난한 자"처럼 되려는 바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보다 "형제애" 갸념을 더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데서 출발한 것인데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을 말한다.
그는 사회적 계급이 분명했고 수도회들 안에서도 신분이 낮은 이들에게는 평수사 직분만 허용하였던 시대에서 "자신의 수도회에서는 아직도 참된 형제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의 정신은 성별 계층 계급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에 대한 형제애로 확장되었고 더 나아가 자연과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성인은 1224년 9월 14일 라 베르나(La Verna)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통해 오상(五傷)을 받았다. 손과 발에 나타난 상처에는 연골 형태의 못까지 있었다.
오상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상황이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의 회개와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중부 지역으로 두루 다니는 투혼을 발휘했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임종이 다다르자 회원들은 성인의 원의에 따라 수도회 요람인 뽀르찌운꿀라로 모셨고 1226년 10월 3일 요한 복음의 수난기를 들은 뒤 눈을 감았다.
죽음에 앞서 남긴 성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회개와 복음적 소명에 대한 주님께 드린 뜨거운 감사였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형제회를 창설하신데 대한 확신"이었다. 그는 또한 초창기의 완전한 가난 단순 겸손을 회상하며 특히 육체 노동에 대한 기쁨을 회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프란치스코는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